2012년은 조용한 한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4월의 선거, 5월의 여수 박람회, 7월의 런던올림픽, 12월의 대통령 선거와 같은 굵직한 이벤트가 넘쳐난다. 이러한 시기에 중심을 잡고 업무에 충실하기란 쉽지 않다. 반복되는 유사 정보의 홍수와 이익집단의 집요한 홍보나 로비는 방송, 언론은 물론 인터넷과 스마트폰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부분의 내용은 깊이가 부족하며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국민의 수준을 하향시킨다고 보는 것은 필자만의 기우일까.
그러나 현재 많은 전문가와 기관이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미래에 추진해야 할 정책에 대하여 논의하며 준비하고 있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라고 본다. 역사를 뒤돌아보고 실패를 교훈삼아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그 시도 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또한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고 이를 사전에 준비하여 도래할 지도 모르는 재앙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인 요구와 욕구를 충족시키고 국가의 일체감을 향상시켜서 개개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내용도 포함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정책 아젠다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 한국이 당면한 문제 해결이 최우선이라고 보면 일자리 확충, 삶의 질 향상, divide 의 해소가 최상위의 목표일 것이다. 이를 실현시키는 방편으로 국가 governance의 개편, 산업 생태계의 창조적 혁신, 복지의 확대 등이 의논되고 있다. 정책 아젠다는 더 자세한 수준으로 이를 구체화 시킨 것으로 예를 들면 벤처-중소기업의 지원으로 일자리 창조, 지적재산권의 공정한 관리 등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타난 아젠다들을 보면 왠지 밋밋하다. 새로운 항목도 추가되고 우선순위의 재배치도 없지 않지만 이전에 제시된 항목들을 조금만 바꾸고 소위 재탕한 것이 대부분이다. 왜 그럴까.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별로 변하지 않았으니 답안지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필자가 보기엔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십년 전에 통용되던 가치관이 새로운 틀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그 저변에는 IT (정보기술)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사회, 경제, 문화, 정치, 교육 모든 것이 움직이려면 IT가 잘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IT는 이런 모든 것의 성능을 개선하는 수단에 그쳐서는 안 된다. IT의 특징은 그 무서운 발전 속도에 있고, 가치중립적이면서 동시에 개방적인 그 유연함에 있다. 정책의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IT를 통한 성능개선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IT의 특징을 잘 반영한 패러다임 변혁을 정책 수립의 기본으로 삼을 때에 신선하고 효과적인 아젠다가 탄생할 것이다.
과학기술분야의 패러다임은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을까 ? IT처럼 속도와 유연함을 잘 살리려면 우선 과학기술의 조직과 직업에 팽배한 경직성을 줄여야 한다. 과학기술자에게 직업 안정성만큼 중요한 것은 적절한 연구환경을 따라 쉽게 조직과 팀을 옮겨 다닐 수 있는 mobility의 보장일 것이다. 아주 우수한 연구자에게는 여러 팀이나 조직에서 그 능력을 공유하는 smart work 형태도 좋다.
IT 역사를 보면 국가나 대기업이 정한 시나리오대로 IT산업이나 기술이 발전한 적이 없다. 개방, 유연성, 협동과 융합을 보장하면 저절로 생태계가 조성되는 것은 IT 선진국에서 보아온 일이다. 공공의 과도한 정책 주도, 갖가지 규제를 통한 특정 분야의 진흥은 이제 그만 둘 때가 아닐까. 과학과 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는 간섭과 규제가 없을 때에 그 효과가 진정으로 발휘되는 법이다. 다양성과 중복, 경쟁과 조율은 상호 보완적이고 피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닌가.
IT는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여 무한한 정보와 지식을 창조하고 다룬다는 점에서 배울 점이 많다. 과거의 정책 패러다임이 한정된 자원과 자본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운영하여 가치를 극대화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한계를 극복하고 외연을 넓힐 수 있을까에 더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있다. 안을 보기 보다는 밖을 내다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에만 의존하는 과학기술 연구개발은 글로벌 인재가 참여하는 협력체제로 대치되어야 한다.
IT의 진정한 파워는 틀린 것을 용납하는 톨레랑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설파한대로 기술과 교양의 교차점에서 탄생하는 막강한 상상력은 IT 창조와 발명의 원동력이며 이는 정해진 정답을 찾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새로운 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잦은 실패를 수반한다. 이를 용납하고 재기의 기회를 줄 때에 사회는 발전하고 divide가 줄어들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IT를 성능개선의 도구로만 쓸 것이 아니라 IT로부터 새로운 패러다임을 배워야 한다. 앞으로 개발될 많은 국가 아젠다에서 IT 가치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쓴다.
글쓴이: 최양희 교수(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공학부 간사, 융합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yhchoi@snu.ac.kr